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내전 (문단 편집) === 한국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ong_Beom-do_1921.jpg]] || || '''적군의 제식 군모인 부됸노프카를 쓴 [[홍범도]] 장군''' || 러시아 내전에서 많은 극동 지방의 한인들이 적군에 많이 가담했다. 일본이 세력을 넓히기 위해 연해주 일대로 들어와 적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탄압받던 한인들은 주로 사상적인 이유보다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적군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적군 내에서도 이들 한인 부대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증언이 많았다. 다만 이들은 의도치 않게 소비에트 정부의 지휘에 따라 백군과도 전투해야 했다. 만주 지역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가담했던 한인들도 [[국공내전]]에서 국민혁명군과의 전투에서 소모된 경우가 이와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적군뿐만 아니라 백군에 가담한 한인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시가 [[국군]] [[제5보병사단]]의 초대 사단장이었던 김상겸 대령. 그는 내전 이후 폴란드군에서도 복무했던 특이 경력자였다. 또 이 전쟁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진영의 분열을 일으킨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유시 참변]]. 당시 좌우 할 것 없이 수많은 독립군들이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이후 [[국민혁명군]]과 [[대한민국 육군]]의 장성으로서 [[중일전쟁]]과 [[6.25 전쟁]]에서 일본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큰 공을 세우는 [[김홍일(군인)|김홍일]] 중장도 불과 21세의 나이로 적군에 가담해 대한의용군을 지휘하며 시베리아 전역에서 백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지연 철수전을 수행했다. 다만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적군에 가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서 자유시에 독립군들이 집결하니 휘하 병력을 데리고 자유시로 가라는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중간쯤 왔을 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근처 러시아 한인촌에서 백군측에 일본군이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적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고 소련측이 한국 독립운동을 영 돕지 않자 배신감에 치를 떨며 미련 없이 러시아를 떠나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 위에 언급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선박으로 귀국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이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측에 매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